강자임은 궤변을 위한 보증수표가 아니다

Posted by 경희대 여성주의 웹진 순
강자임은 궤변을 위한 보증수표가 아니다

<강자임은 궤변을 위한 보증수표가 아니다>
- 윤경석 학우의 성차별·성폭력 의식 수준의 함량 미달을 심각하게 바라보며 -


  5월 10일, 물리학과 11학번 윤경석 학우는 <약자임은 정당성을 위한 보증수표가 아니다>라는 대자보를 게시했습니다. 이 대자보에서는 총여학생회에 대한 비판 및 성차별과 성범죄에 대한 내용이 실려 있었습니다. 윤경석씨가 지적한 성차별, 성범죄에 대한 주장이 논리결여의 문제가 있을 뿐만 아니라(<그림 1> 참고) 여성혐오와 성차별적인 관점을 포함하고 있어 경희대학교 여성주의웹진 순이 반박대자보를 게시하게 되었습니다.

 

 

 

<그림 1> 윤경석 학우가 참고한 리브레 위키 글 발췌


 1. 성차별과 성폭력에 대한 근본적 이해 부재


  윤경석 학우는 본인의 글에서 반복적으로 ‘성차별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쪽에서 성차별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입증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계십니다. 이와 같은 주장은 성차별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음을 증명하며, 성별과 섹슈얼리티 간의 위계, 그리고 소수자의 위치에 대한 어떤 사전 지식도 없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 번도 상상해 보신 적 없겠지만, 성차별 혹은 성폭력이라는 것은 흔히 ‘사적’이라고 구분되는 공간에서 은밀하고 사소하게 벌어집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욕설 혹은 심각한 물리적 폭력을 수반해야만 차별, 폭력이라고 이해하는 우리 사회에서 많은 수의 성차별, 성폭력이 쉽게 무시되는 이유입니다. 언어 성희롱은 ‘외모에 대한 관심’ 혹은 ‘걱정’으로 포장되고, 강간은 섹스로 통하는 사회입니다. 쉽게 말해 맞아 죽지 않으면 폭력이 아니고, 그런 폭력이 없이 강간을 당했다면 그건 섹스인 사회에서 자신이 당한 성폭력, 성차별을 입증하는 일은 당연히 쉬울 수 없습니다. 상상하시는 것처럼 눈에 보이는 통계로, 숫자로 피해를 입증하는 게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학내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언어 성희롱과 성차별 중, 성폭력을 하나의 예로 들겠습니다. 믿지 않으시겠지만 학내에서 쉽게 발생하는 성폭력 사례는 우리가 소라넷 사건에서 목격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많은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술을 먹이고, 의사를 표현할 수 없는 상태가 되면 방에 데려가 ‘섹스’를 하는 방식이죠. 이런 방식의 성폭력에 대해 사람들이 무지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술을 마시고 의사 표현이 불가능한 사람과 섹스를 했다’는 사실을 강간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회 전반의 분위기 때문입니다. 강간을 강간이라고 부르지 못하는 거죠. 실제로 소라넷 유저들은 약이나 술을 먹인 뒤 여성을 강간을 하면서, 피해 여성을 ‘골뱅이’라고 부르거나 함께 강간을 하는 가해 남성을 ‘초대남’정도로 지칭하는 행위를 통해 자신들의 극악무도한 범죄 행위의 의미를 희석 시켜버리기도 했습니다. 강간과 섹스를 구분하지 않는 행위, 눈에 보일만한 폭력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강간이 아니라고 이해하는 태도는 강간을 강간이라고 부를 수 없게 만듭니다. 
  두 번째는 학내 성폭력이 언제든지 다시 마주칠 수 있는 사이에서 일어나며, 가해자는 학번이나 성별, 학내 공동체 내에서 우위를 가지기 때문입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피해자는 피해를 당하고도 어떤 이유에서 자신의 피해 사실을 공개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아침에 옷이 다 벗겨진 채로 남의 자취방에서 눈을 뜬 피해자는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되겠지요. 누구에게 이야기를 해야 할까,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할까, 술에 취해 기억을 잃은 내 잘못은 아닐까, 이걸 말하면 과에서 내가 매장 당하지는 않을까. 그래 차라리 강간이 아니었다고 생각하자. 내가 좋아서 나랑 섹스 한 걸 거야. 설마 강간이었겠어? 피해자는 대체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될까요? 가해자를 다시 봐야하니까요. 학교도 같고, 과도 같고, 동아리까지 같다면 상황은 더욱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맞은 적도 없고 협박도 없었는데 강간당했다고 하면, 공동체에서 먼저 매장되는 건 대체 누구일까를 고민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문제는 앞서 지적한 첫 번째 문제, 강간을 강간이라고 부르지 못하는 사회의 분위기와도 직결되는 것입니다. 
  성폭력과 성차별을 눈에 보이는 통계로 파악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통계 수치를 만드는 일보다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성폭력과 성차별의 특징과 맥락을 이해하는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결국 이런 이야기들을 공론화 시킬 수 있는 채널이 학내에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성범죄는 신고 되지 않습니다. 유죄판결을 떠나 사건을 접수하는 것만으로도 피해자는 많은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범죄 피해자를 옆에서 격려해주고 도와주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윤경석 학우께서 지적하신 ‘총여학생회의 삽질’들 역시 이런 차원에서 본다면 적잖이 유의미한 활동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총여학생회의 전반적인 활동을 자리에서 평가할 수는 없겠으나, 학내에 이런 채널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리고, 수면에 올라오지 않은 피해자들을 공론장으로 초대하는 활동들을 단순히 폄훼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2. 성범죄에 대한 왜곡된 인식


  학우는 성범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했습니다. 첫째, 남성이 여성을 억압하지 않을 경우 일어난 ‘자유로운 성관계’는 성범죄가 아니다. 둘째, 피해자 중심주의는 피해자의 진술만을 중시해 다른 문제를 유발한다. 
  첫 번째 주장은 앞서 지적한 ‘강간을 강간이라고 부르지 못하는 사회 분위기’와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이와 같은 문제는 ‘자유로운 성관계’라는 환상에 가까운 단어에서부터 발생합니다. 누가 내 손을 수갑으로 묶어둔 것이 아닌 이상 난 자유롭다는 그런 판타지와 같은 것이죠. 실제로 강제적이고 극단적인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성범죄는 전체 성범죄 중 일부분만을 차지합니다. 이미 말씀 드린 것처럼 성폭력은 ‘사적’이라고 구분되는 공간, 즉 가족, 친인척, 친구와 같은 친밀한 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미 합의 되었다고 전제되는’ 부부나 애인 사이에서도 성폭력이 발생하고, 요즘에는 ‘데이트 폭력’도 주목을 받는 추세이지요.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앞서 언급한 여러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섹스를 ‘자유로운 성관계’라고 가정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실제로 학우가 주장한 ‘자유로운 성관계’ 자체에 의문을 지녀야 합니다. 성폭력 상황에는 상대방과의 권력 관계 혹은 주변 사람들의 시선 등 수많은 요인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단순히 억압과 직접적인 폭력이 일어나지 않은 성범죄를 폭력이 아니라고 단정질 수는 없습니다. 한 쪽이 칼을 들고 협박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주먹으로 때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반드시 두 사람이 ‘자유롭고 평등한’ 상황에 위치해 있다는 것을 보증해주나요? 이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하신다면 대체 무슨 수로 설득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두 번째로 학우께서는 피해자 중심주의는 피해자의 진술만을 중시해 다른 문제를 유발한다고 지적하셨습니다. 실제로 여성주의자들 사이에서도 피해자 중심주의에 대한 여러 가지 의견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경석 학우께서는 피해자중심주의에 대한 심화된 논의를 펼치기보단 성폭력 피해자의 상황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도 하지 못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학우께서는 피해자 중심주의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피해자의 진술의 합리성, 일관성, 객관성 등과 피해자의 성품, 인격적 요소 등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하고 계신지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째서 폭력을 당한 피해자가 성범죄를 당했다는 공포 속에서 피해 사실을 자세하고 객관적이고 일관적으로 묘사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하시나요? 
  또한 피해자의 성품, 인격적 요소를 고려해야 된다는 지점은 폭력이 일어난 행위 그 자체를 문제로 삼는 것이 아니라 마치 피해자인 여성이 하자가 있는 여성이기 때문에 이러한 폭력에 노출되는 것은 정당하다는 시선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대체 피해자의 성품과 인격적 요소를 왜 고려해야 합니까? 성품이 나쁘거나 인격적으로 덜 떨어지는 사람은 폭력을 ‘당해도 싸다’는 말씀이신가요? 물론 이런 시선은 비단 경석 학우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반에 만연한 분위기이지요. 단지 그 사람의 품성이나 배경에 상관없이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폭력을 가해서는 안 된다는 기본적인 합의가 필요할 뿐인데, 그것이 어려운가요?


 3. 사회 내 만연한 여성혐오의 실체


  학우는 또한 ‘여성혐오는 실체 없는 개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여성혐오는 이미 우리 사회에 너무나도 만연해있는 개념입니다. 우선 여성혐오의 개념은 단순히 여성을 싫어하는 것이 아닌, ‘여성을 사회적 주체로 인정하지 않으며 배제하는 행위’입니다. 소비하는 주체인 여성을 ‘된장녀’로 낙인찍고, ‘김치녀’라 부르며, 성형을 많이 한 여성을 ‘성형괴물’라고 명명하는 것은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여성혐오의 예시 중 하나입니다. 여성혐오는 단순히 여성을 명명하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총여학생회에서 진행한 ‘여혐인더트랩’과 ‘여혐 정치인 투표’ 캠페인을 봐도 사회에서 여성혐오가 얼마나 숱하게 일어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여성을 ‘아이를 재생산하는 도구’로만 취급하는 사회의 인식, 여성을 ‘낮에는 조신하고 밤에는 여우같은 존재’라며 성적 존재로만 한정 짓는 시도, 김무성이 ‘애 많이 낳는 순서대로 여성 비례 공천을 줘야 된다’라며 여성을 ‘애 낳는 기계’로 취급하는 것, 김을동이 ‘여성이 너무 똑똑한 척을 하면 굉장히 밉상을 산다’라며 여성을 ‘순종적인 존재’로 취급하는 것. 이것이, 여성혐오가 아니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또한 이러한 여성혐오는 단순히 대학을 제외한 사회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학 내에서도 여성들은 숱한 성차별과 여성혐오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천 개의 공감> 성차별 발언 사건, 호관대 몰카 사건, 여성을 성적 도구로 활용하는 주점 홍보 문구 등은 성차별의 단적인 예시를 보여줍니다. 이러한 큰 사건뿐만이 아니라 대학 내에서 성차별과 여성혐오는 계속해서 생산되고 있습니다. 여성의 짧은 옷차림을 보며 몸을 훑고 지나가는 행위, 여성의 외모와 몸매에 대한 평판, 강의실에서의 각종 성차별 발언들……. 대학 내에서 여성이라면 누구나 한 번 쯤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러한 폭력을 겪게 됩니다. 그러나 여성들은 이러한 성차별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분위기로 인해 이러한 경험을 쉬쉬하거나 침묵했을 뿐, 제대로 된 대응을 할 수 없었습니다. 대학 내에서 여성의 차별 경험은 억압된 채 있을 뿐, 결코 여성이 이것에 대해 침묵했다고 해서 폭력과 피해가 존재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4. 글을 마무리하며


  마지막으로 한마디 드리겠습니다. 여성이 공적 영역에서 겪는 경제적·정치적 불평등, 그리고 사적 영역에서 벌어지는 성폭력의 특수성(늘 물질적 폭력을 동반하지 않고 다양한 상황적 변인이 존재)은 여성의 사회적 위치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필수적인 조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내 눈에 보이지 않고 내 귀에 들리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믿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 어떤 것도 입증해서 보여줄 수가 없습니다.
  성차별의 존재도, 성범죄 피해자의 상황도 고려하지 않으면서 이를 해결하고자 하는 모든 행동을 ‘꼴페미’의 우기기로 매도하는 사람을 우리는 바로 ‘성.차.별.주.의.자(SEXIST)’라고 합니다. 이 글에 답을 쓰는 이유는 여성들이, 그리고 사회적으로 약한 위치에 놓여 있는 주체들이 당신의 생각에 동의하지도 않으며 당신의 주장은 명백한 차별이고 비판받아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경희대학교 여성주의웹진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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