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I’m not feminist, but..., 2015)> 리뷰

Posted by 순자매1호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I’m not feminist, but..., 2015)> 리뷰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I’m not feminist, but..., 2015)> 리뷰 

 

이 영화의 제목인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은 1985년에 시몬 드 보부아르와 함께 출연한 TV 프로그램에서 

크리스틴 델피가 사용한 표현이다. 언제부터인가 이 표현은 낙인 찍힌 용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지만 평등에 대한 욕망은 기꺼이 드러내고자 많은 여성이 사용하는 문구가 되었다. 

인터뷰와 자료화면을 바탕으로 구성된 이 다큐멘터리는 페미니즘 사상사와 활동가, 그리고 1970년대 프랑스 

여성해방 운동의 선구자에 대한 초상을 다룬다. 아울러 성평등을 쟁취하기 위한 과거와 현재의 투쟁을 강조하면서 

프랑스 페미니즘을 대표하는 주요 인물의 역사를 들려준다.                                         

                                                                                                                                                  [제 17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지금, ‘어느 곳에서나 가능한 n개의 페미니즘이 있다’고 말하는 건 꽤나 무책임하고 지나치게 포괄적인 표현이라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적어도 하루에 몇 번은 필자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고백이며 스스로에게 거는 주술과 같은 것이다. 그만큼이나 페미니즘으로 불릴 수 있는 자세나 논리는 다양한 국면으로 분절된 것이 현재의 상황이므로. 가령 나는 짧은 스커트를 즐겨하며 입고 몸에 군살이 생기면 식사량을 줄이거나 운동을 하면서 나의 육체를 관리하고자 한다. 이러한 관리는 누군가의 시선에 아름답고 싶고 성적 대상화가 된 내 몸에 익숙해진 소위 말하는 자기관리인가? 라고 쉽게 되물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내 몸이 여성으로써 입을 수 있는 수많은 옷들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것이고 기왕이면 그것이 나를 아름답게 꾸며주면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할 뿐. 그리고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시대에서 남성에게 성적 대상화가 되고 관음의 대상이 되어 ‘시선강간’을 느끼는 불쾌한 경험을 예방하기 위해서 그런 옷을 미리 입지 않는 것만큼이나 철저하게 남성의 시선을 내재한 자기검열이 어디있는가. 현재 나에게 주어진 것과 스스로 느끼고 쌓아온 여성으로서의 미적인 것, 또는 아름다움에 대한 가치대로 사는 것이 맞다고. 이토록 자기검열을 넘어서 나 스스로의 내적 논리를 찾아가는 고민을 매일 하는 것이다. 여기에 현재 페미니즘의 자리가 있다. 매일 나의 시선에서 남성의 것을 떼어내고자 노력하면서 동시에 나 자신의 내적 논리를 통해 스스로를 모종의 해방에 가까운 상태로 만드는 이 과정이 앞서 밝힌 n개의 페미니즘이다. 얼마나 부자연스럽고 귀찮은 일인가. 나에게서 의식적으로 비곗덩어리를 찾아내는 이런 일이란. 

 

  적어도 내가 아는 한에서는 2세대 페미니즘이라 불리는 1960년대 이후의 페미니즘 운동은 나 자신에게 주어진 사회적 코르셋을 어떻게 바라보고 저항할 것인가에 대해서 강조해왔던 것 같다. 이에 동반되는 것은 여성의 의식이 입고 있는 브래지어와 코르셋을 찾아내고 그것의 후크를 풀어버리는 것이었다. ‘노-브라’ 상태가 되려는 장소, 여기에서는 남성이나 전통의 시선이 먼저 작동하는 지점을 찾아내는 작업이 필요했고 그러기 위해선 먼저 그들의 시선을 사고하고 비판하고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바지런함이 필요했다. 그리고 현재 3세대 이후의 페미니즘이랄 수 있는 시간에서는 남성의 시선이 내면화된 자기검열의 촘촘한 (그것도 한꺼번에 중층적으로 효과를 발휘하는) 그물망을 해체시키는 n의 성(sex도 gender도 모두 좋다)이 성립하는 것이 아닐까. 필자는 2세대 페미니즘이 쟁취한 인식의 저항성의 수혜에 소속해 있으면서도 그것이 가진 엄격함이나 이제는 보수적인 되어버린 어떤 논리에 대하여는 나의 경험이 우세하다고 여기며 나의 개별적인 성을 가지려고 한다. 그러한 것은 고전적인 성역할도 1960년대의 급진적인 성도 아닌 지금 여기에 있는 나의 n개의 성이다. 

 

  한국에서 통칭 ‘페미니즘’이라 불리는 학문은 국경을 넘어가면 에코 페미니즘, 마르크스 페미니즘, 신학 페미니즘, 의학 페미니즘 등등 많은 학문 분야와 접속하고 있다. 이처럼 많은 접목이 가능한 것은 공기처럼 자연스러운 성차(별)가 이 세계의 기원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 세계와 맺는 관계가 자연스럽거나 매끈하다는 것은 차별적인 것에 익숙한 일반의 삶을 사는 것이고 그만큼 세계의 논리가 한쪽 성에 의해서 세워졌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게 한다. 하지만 현재 n개라는 무한한 수를 반복해서 생산할 수밖에 없는 모순적인 인식 속에서 페미니스트는 피곤하다. 스스로의 내면에서 자기 분열을 반복하는 건 절망과 피곤함을 수반하는 일이기에. 어느 한계점에선 ‘내가 이렇게 미쳐가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한남’ 또는 ‘김치남’이 멍청하고 한심하면 만나지 않으면 된다. 어떤 이들이 소위 기가 센 여성들에게 경멸하는 듯이 던지는 그 질문 “혹시 페미니스트세요?”라며 모욕적인 기분을 느끼게 할 요량으로 특정 분위기를 형성하는 질문을 할 때와 같이 그들을 모욕하려는 의도로 욕하고 침 뱉어버리면 된다. 그런데도 나는 ‘한남’과 연애를 한다. 또는 연애를 해야만 한다. 왜? 사랑 또는 연애(사랑과 연애는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비슷한 구석도 있어서 나누어 말한다)는 나에게 내 스스로가 줄 수 없는 선물을 주기 때문이다. (필자는 지속가능한 연애와 페미니즘이 공존하는 삶을 지향한다) 물론 그 과정은 꽤나 작위적이고 부자연스러우면 투쟁적이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촌극이 곁들여지기는 한다. 왜냐하면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이라고 대답하지 않기 때문이다. ‘페미니스트’라는 정체성에게 주어지는 묘한 비꼬는 듯한 사회(역사)적인 시선과 냉소를 먼저 인정하고 그럼에도 나는 ‘여성’이다라고 연애의 대상에게 주장하기 때문이다. 복잡하게 엉킨 나의 내면에 있는 모순만이 아니라 상대방의 모순까지도 문제삼아야 하기 때문에 나의 애인들과 나는 지나치게 예민하고 지나치게 싸운다. 매번 상황이 이렇게나 드라마틱하고 피곤하기 때문에 자기분열을 겪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친구들마저 ‘자기애가 과한 것 아니야?’ ‘자격지심이 너무 세지 않니?’라며 나의 과로하는 감정과 연애를 힐난하면 나의 붕괴는 속도가 빨라진다. 

 

  영화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에서 프랑스의 마르크스 페미니스트인 크리스챤 델피는 ‘언니’만이 줄 수 있는 침착한 자세를 제시한다. 영화 제작자인 티소의 행복하냐는 질문에 “무언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에 대해 분노하고 행동해야겠다고 생각했는 데, 분노는 행복한 것이 아니지 않느냐”고 흔들림 없이 평이한 분위기를 풍기며 대답한다. 그렇다. 이 세계에서 사회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여성’이라는 성을 부여받은 나는 자주 분노해야만 하고 애인의 몫까지 미리 분노를 해야한다. 하물며 애정의 대상이 아닌 인간들이 나 자신의 분열을 유발하는 일이 생기면 그 부당함에 치를 떨면서도 나 스스로의 동일성을 찾아내야 한다. 바깥의 요구를 비판하는 동시에 과도하고 보수적인 여성주의의 지나간 세대가 내게 남긴 여성주의를 경유하여 현재의 내가 가져야 하는 태도를 찾아가려고 노력해야 한다. 분노하기 쉽고 절망하기도 쉽다. 도저한 언어만큼이나 지치기 좋다. 그밖에 나는 학위 과정중에 있는 과정생이며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할 일이 많은데 나의 몫이 없음을 주장하기 위한 도정은 생활과 함께 유지되어야만 한다. 역시 지나치게 피곤하다. 부자연스럽다. 무언가 과하다는 인상을 스스로도 지우기 어렵다. 그럼 이쯤에서 그만두어야 할까?

 

  그만두긴 뭘 그만두나. 나는 살아야 한다. 

 

  밤길을 걸으면서 하루에 데이트 폭력으로 죽어가는 여성의 수를 마음 속으로 헤아리며 동시에 손에 쥔 우산을 날렵하게 휘두를 수 있다고 주문을 걸면서 밤길을 걸어야 한다. 이 밤을 두려워하지 않고 걷고 싶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기 때문에 나 스스로 이 세계 구조를 혁명시키고 뒤집을 수 없다는 비난을 늘 받으며 또 나도 그걸 인정하는 건 비겁하다고 여기면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세상의 밤을 걸어야 하기 때문에 나는 이미 시작된 나의 분열을 계속 경험하길 멈출 수 없다. 이런 고민이 오랜 시간 내 생활에 고여있었기 때문에 델피의 흔들림 없는 저 말투는 감화력이 있었다. 크리스챤 델피가 화면 속에서 보여주고 있는 침착함과 우아함은 누군가로부터 자연스럽게 증여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52분짜리 필름은 보여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프랑스의 페미니즘의 역사의 증인으로써 동시에 자신의 삶의 증인으로써 그녀는 여전히 쉽게 낙관하지도 비관하지도 않고 있었다. 분명 그녀는 평생 모욕의 대상이 되거나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문제적인 인간으로 지목되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제는 지나간 유행어가 되어야하는 단어 목록에 있을 법한 ‘이데올로기’라는 말은 어쩔 수 없이 우리가 세상을 감지할 수 있는 인지의 망으로도 남아있기에 계륵과 같다. 페미니즘은 ‘이데올로기’이면서도 ‘이데올로기’를 없애기 위해 싸워야하는 도구가 되어버렸다. 그런 점에서 현재의 페미니즘은 무수한 모순에 노출되어 있고 각각의 쟁점이 하나의 의견으로 수렴되기 어렵게 되어 있다. 델피는 이러한 인종주의, 가부장제라는 ‘이데올로기’가 페미니즘을 이용하는 것을 반대하기 때문에 프랑스의 이슬람공포증이 페미니즘을 이용하는 것을 반대한다. 하지만 다른 페미니스트들에게 있어서 차도르는 여성의 성을 억압하는 대표적인 이슬람의 통치수단이기도 하다. 이처럼 페미니즘이라는 현장에서 벌어질 수 있는 상이한 입장 차이들은 사회적인 쟁점의 차원만이 아니라 페미니스트 개인에게도 주어지는 여럿의 입장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차이들에 대해서 페미니스트들은 입장을 달리하는 만큼 논쟁적일 수 있고 운동 안에서 내상을 입기도 한다. 자연히 그 내상은 가담자 내면에도 치명적이다. 델피는 늘 뜨거운 감자인 여성주의의 다양한 논점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녀의 저서가 공식적으로 출판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알 수는 없었다. 그런데 영화의 막바지에 델피가 했던 말은 모순과 분열 속에서도 피곤하고 부자연스럽고 시끄러운 이 논쟁을 계속해야만 한다고 다시 마음을 다잡게 하는 힘이 있었다. 그녀는 우리가 지금까지 단 한번의 전복적인 혁명과 같은 계기를  통해서 공기와 같이 존재하는 성차별과 여성에 대한 폭력을 제거할 수 없었음을 인정하는 듯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아마도 좌절과 절망에는 내성이 생겨버린 것이라 필자는 생각한다) 다음 세대에게 기대를 걸어야 한다고 했다. ‘다음 세대’라는 말에서 나는 50여분간 기다렸던 핵사이다를 대체할 지혜를 얻어버렸다. 내가 기다렸던 언니의 일침, 사이다 발언의 치명적인 섹시함과 명쾌함보다 더 확실한 것이 저것이 아닐까.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절망’의 유사어는 ‘다음’이 되어야만 하는 건 아닐까. 

 

  한국에서 오래 지속되고 있는 여성주의의 여럿 쟁점 중에서도 가장 특수한 쟁점이랄 수 있는 위안부 문제야 말로 ‘다음 세대’를 약속하는 여성주의의 결실이자 현장이라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 역사의 장에서 남성주체에 의해 기입되지 않은 역사 속에서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의 피해자 자신이 스스로 역사의 일부라며 스스로 주체화하고 몫을 주장하면서 시작된 어떤 주체화의 작업. 그것이 90년대초부터 지금까지 계속되어오고 있으며 쉽게 해결되길 거부하면서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는 그런 힘. 그건 ‘다음 세대’에 대한 기대없이는 또한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언니들의 자리를 만들어주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을 한다. 

 

  현재 한국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 그리고 위안부 문제뿐만 아니라 여성주의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은 단 하나의 태도로 수렴할 수 없는 무수한 분열된 목소리를 유발하는 개별성과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오늘도 n개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나의 페미니즘이 델피가 말했던 ‘다음 세대’의 한 모습일 것이고 n의 n승의 숫자가 이 공기를 바꾸지 않을까. 뭐 그런 불순하고 턱없이 근거가 부족한 자기논리(혹은 합리화)화를 해야만 하지 않을까.  

 

* 외부 기고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