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 페미니즘에 투표한다

Posted by 우주먼지
나는 오늘 페미니즘에 투표한다

 요 며칠 내린 비가 무색하게,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머리와 등이 뜨거워지는 날씨였다. 입고 나온 기모 후드티를 원망하며 연신 부채질을 하고 있는데, 옆에서 낯선 여자가 말을 걸어왔다. "더우시죠? 저도 더워서 겉옷을 벗는 바람에 겨털 아웃팅했어요." 이 말을 듣고 나니 내 겨드랑이에도 자유가 찾아온 것만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팔을 들어 올려 겨드랑이를 부채질하고 싶었지만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 간신히 참고 있던 참이었다. 참을 필요가 없었다. 여기는 바로 페미니즘 집회이고,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페미니스트이기 때문이다. 

 콧등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는 무더운 날씨에도 4 15일 광화문 세종대왕 앞 광장에는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모였다. 저마다의 의미를 담은 피켓을 손에 들고서. 분홍색 배경에 더 진한 분홍색으로 쓴 "조개가 몰려오는데 해일이나 줍고 있...?" 피켓과 노란 바탕에 붉은 글씨로 쓴 "그 좋은 걸 왜 너랑 해" 피켓이 눈에 띄었다. 이밖에도 "내가 입고 싶어서 입었다 왜!", "페미천국 불신지옥", "VOTE FOR WOMEN", "NO MEANS NO" 등 저마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담은 피켓들이 광화문 광장을 장식했다. 피켓의 색깔도, 모양도, 내용도 달랐지만 목소리는 하나로 모아졌다. "나는 오늘 페미니즘에 투표한다."

 무대에 선 사회자가 발언을 마친 후에는 둥근 원을 만들어 페미니스트 소모임을 진행했다. 예닐곱 명의 페미니스트들이 무리를 지어 서로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었다. 나도 그 틈에 끼어 이야기를 나눴다. 토론을 이끄는 사회자가 "통성명할 때 나이나 출신 학교, 출신 지역 등은 삼가 달라"고 부탁했다. 나이를 빼고, 출신 학교를 빼고, 출신 지역을 빼니 이 말만 남았다. "저는 페미니스트 OOO입니다." 그 뒤에는 저마다 <나는 오늘 페미니즘에 투표한다>집회에 나온 이유를 덧붙였다.

 페미니스트 시에나 씨는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일어난 여성혐오 살인 사건 이후 페미니즘 운동에 꾸준히 참여하고 있다", "여성도 마음 놓고 집에 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 여기에 나오게 됐다"고 말했다. 페미니스트 K 씨는 자기 자신을 레즈비언이라고 밝히며 "며칠 전 군부대에서 있었던 동성애자 색출 뉴스를 보고 이 자리에 나왔다"고 말했다. K 씨는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사회에 살며 전투 의지가 샘솟았는데 여기서 전투력을 보여주겠다"고 덧붙였다.

 간단한 자기소개 및 집회 참여 이유를 주고 받은 후에는 주최 측에서 준비한 "페미니즘은 (   ) 세상을 만들 것이다" 피켓에 빈칸을 채우는 시간을 가졌다. 무엇을 쓸지 고민하던 사람들은 이내 굵은 매직으로 망설임 없이 빈칸을 채워나갔다.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 사건 이후 여성 안전에 관심이 많아졌다는 시에나 씨는 "페미니즘은 (내가 술 퍼마시고 밤늦게 집에 가도 안전한) 세상을 만들 것이다"라고 썼다.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세상과 전투하겠다는 K 씨는 퀴어들이 벽장 속에 숨지 않고 사랑을 할 수 있는 사회를 바라며, "페미니즘은 (벽장 없는) 세상을 만들 것이다"라고 적었다. 30분 동안의 수다를 마치고 나서는 함께 사진을 찍으며 전화번호를 교환했다. 언젠가 페미니즘 집회가 다시 열릴 때 마주칠 수 있겠다 싶어 헤어지는데 섭섭하지는 않았다.

 둥글게 모였던 사람들이 흩어지고 무대 앞 '페미니스트 마이크'에 피켓을 든 사람들이 줄을 섰다. 주최 측의 배려가 돋보이는 시간이었다. 사회자가 마이크를 독점하지 않으려 무대 앞에 집회 참가자를 위한 마이크를 따로 준비했다. 모두가 연단에 설 수 있었다. 사람들은 '페미니스트 마이크' 앞에서 자기가 생각하는 페미니즘 정치란 무엇인지 외쳤다. "페미니즘은 (가사 노동자인 우리 엄마가 고임금을 받고 일하는) 세상을 만들 것이다." "페미니즘은 (여학생, 여대생, 여교수, 여선생이라는 말이 사라지는) 세상을 만들 것이다." "페미니즘은 (사랑을 그저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세상을 만들 것이다." "페미니즘은 (가부장과 성차별주의자가 상상도 하지 못한) 세상을 만들 것이다."

 집회는 광화문에서 종각을 지나 주한 일본대사관 앞 위안부 소녀상이 있는 곳까지 행진하며 끝을 맺었다. 소녀상 앞은 '위안부 합의 무효' 서명판에 서명하기 위한 사람들로 북적였다. 주최 측 스피커에서는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시선 속에서 말은 필요 없어 멈춰져 버린 이 시간 사랑해 널 이 느낌 이대로 그려왔던 헤메임의 끝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 이젠 안녕 수 많은 알 수 없는 길 속에 희미한 빛을 난 쫓아가 언제까지라도 함께 하는거야 다시 만난 나의 세계'

 <다시 만난 세계>를 합창하며 사람들은 페미니즘이 바꿔 나갈 미래를 상상했을 것이다. 나는 이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 앞으로도 이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언젠가 페미니즘 집회가 다시 열릴 때, 어느새 정들어버린 이 사람들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집회가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길이 외롭지 않았다. 가방 속에 '우리가 기다려온 사람이 바로 우리, 페미니스트다.'라고 쓴 피켓을 욱여넣으며, 나는 이 피켓을 다시 꺼낼 날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