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콘(노 콘돔)은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Posted by 우주먼지
노콘(노 콘돔)은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J의 이야기 "피가 마르는 줄 알았다. 애인과의 섹스가 끝났을 때 콘돔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섹스 도중에 콘돔이 빠지는 일도 있다더니, 나에게 일어날 줄은 몰랐다. 불행 중 다행으로 콘돔은 질 속이 아닌 이불 속에서 발견됐지만, 불안한 마음에 다음날 아침 일찍 사후피임약을 받으러 산부인과에 갔다. 일반피임약은 약국에서 팔지만 사후피임약은 병원에서 의사의 처방을 받아야만 살 수 있어서다. 애인은 진료실 바깥에서 기다리고 나 혼자 남자 의사 앞에 앉았는데 의사가 하는 말. "조심하지 그러셨어요." 처방전을 받고 고개를  숙인 채 나오는데 얼마나 억울하던지."

 N의 이야기 "나는 생리가 엄청 불규칙적이다. 23, 27, 22일 이런 식으로. 저번에는 생리한 지 10일만에 또 생리를 했다. 이게 생리인지 하혈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애인과 섹스를 했는데 콘돔을 안 끼고 했다. 체외사정도 제대로 된 것인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가뜩이나 한달에 두 번 생리하는 것도 스트레스 받는데 임신 생각까지 떠오르니까 불안하고 미치겠더라. 사후피임약을 처방받기 위해 바로 병원에 갔는데 애인한테는 일부러 오지 말라고 했다. 그냥 같이 가는 게 싫었다. 간김에 생리인지 하혈인지 초음파 검사도 받고 상담도 받았다. (일부러 여성 의원인 산부인과 찾아 갔다.) 다행히 부정출혈이 아니라 생리가 맞았다. 별다른 이상은 없다고 하더라. 그 말 듣자마자 안심되긴 했는데 병원비랑 약값이 오만 원 정도 들었다. 깊은 빡침...돈도 그냥 다 내가 냈다."

 L의 이야기 "나는 섹스가 끝나면 불안하다. (남자친구는 현타에 빠져 있을 시간이다.) 콘돔을 끼고 섹스를 했음에도 그렇다. 어쩌다 생리가 하루라도 늦어진 날이면 밤잠을 설친다. 만약 임신이면 어쩌지. 나는 아이를 키울 경제적인 여력이 없고 아직 대학 졸업도 못 했는데. 낙태를 해야 하나. 어디서 하지. 낙태할 돈이 없는데. 만약 낙태하다 적발되면 어떡하지. 생리가 터지고 나서야 마음이 놓이는 억울한 일상이 반복되면서, 섹스는 좋은데 할 때마다 불안해서 어쩌냐는 푸념을 늘어놓는다."

 여성들은 섹스할 때마다 불안하다. 지구상에 100% 피임을 보장해주는 피임법은 없다. 임신의 가능성은 가임기 이성애자-여성들에게 언제나 잠재돼 있다. 출산을 원하지 않을 때의 섹스가 여성에게 공포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더군다나 한국은 낙태가 불법인 국가다. 지금 당장 아이를 낳을 생각이 없고, 낳는다 해도 양육할 사회경제적 여유조차 없는데 낙태가 죄라고 한다. 낙태한 여성은 법적 처벌을 받을 수도 있단다. 법망에서 빗겨나가더라도 낙태한 여성은 '낙인'이라는 사회적 처벌을 받는다. 출산을 하든 낙태를 하든 비난과 처벌은 여성의 몫인 구조다. 

 그래서 여성들에게는 콘돔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낙태와 출산의 공포 사이에 서 있는 여성에게 콘돔은 최소한의 안전망이다. '노 콘돔 노 섹스(노콘노섹)'는 여성이 출산과 낙태의 공포에서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이다. 그나마 콘돔이라는 피임법이 있어서 임신의 공포를 조금이라도 덜어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위안인지 모른다. 낙태가 죄이기 때문에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이렇게 공포와 직결되는데 남성들은 태평하게 '콘돔을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결성한다. 바꾸어 말하면 '콘돔을 싫어해도 되는 모임'이다.

 남성들이 콘돔을 싫어해도 되는 까닭은 콘돔을 안 껴도, 혹여 이로 인해 애인이 임신을 해도 남성을 용인해주는 남성중심사회가 있기 때문이다. 콘돔을 끼지 않아서 여성이 임신을 했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남성의 문제가 아니다. 남성은 임신과 출산의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며 양육의 책임을 여성처럼 떠안지도 않는다. 여성이 낙태를 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남성은 낙태의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며 낙태죄의 처벌 대상도 아니다. 모자보건법은 낙태의 죄를 여성에게만 묻는다.

 법 뿐만 아니라 남성중심적 문화 역시 성 차별적이다. 남성들이 콘돔을 싫어해도 되는 이유는 콘돔을 안 껴서 여성이 임신을 해도 사회가 '실수쯤'으로 여겨주기 때문이다. 남성에게는 낙태의 죄도, 임신의 죄도 묻지 않으니 남성들은 콘돔을 사용하는 게 의무가 아니라 '불편'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콘돔을 사용하고 말고의 문제는 남성에게 취향의 문제가 된다.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이 "냉면에서 오이 좀 빼주세요"라고 말하듯, "섹스할 때 콘돔 좀 빼주세요"라고 말해도 된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여성들에게 콘돔은 취향의 문제일 수 없다. 남성과 달리 여성에게 '혼전임신'은 실수가 아닌 실패이며 낙태는 용서받지 못할 죄이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도 남성은 법적, 사회적 책임에서 면제되지만 여성은 낙태를 하든 출산(+독박육아)을 하든 사회적이고 법적인 책임을 짊어진다. 양현아 교수는 "낙태를 금지하면서도 실질적으로 허용하는 이중적 관행은 한국의 남성중심적 성의 방종 상태를 정확하게 표상하고 있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노콘(노 콘돔)'을 취존(취향존중)해달라는 주장은 남성중심적 성의 방종을 드러낸다.

 방종을 끝내고 남성들이 콘돔을 싫어해도 되는 조건 자체를 없애려면 피임 교육을 대국적으로 실시해 '노콘노섹'을 의무화하는 것뿐만 아니라, 여성들이 임신과 출산으로 인해 치러야 하는 차별적인 대가를 줄여나가야 한다. 여성에게 그러하듯 남성에게도 '맞비난', '맞처벌', '맞돌봄'이 일상인 사회였다면 "콘돔이 불편하다"는 소리를 감히 할 수 있었을까. 그게 가능한 사회라면 아마 무서워서라도 꼬박꼬박 콘돔을 사용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