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경석 학우의 대자보 <약자임은 정당성을 위한 보증수표가 아니다>에 대한 순 독자 투고글

Posted by 서현
윤경석 학우의 대자보 <약자임은 정당성을 위한 보증수표가 아니다>에 대한 순 독자 투고글

*위 글은 윤경석 학우의 <약자임은 정당성을 위한 보증수표가 아니다> 대자보에 대한 '서현'님의 독자 투고글 입니다.

 

511일 윤경석님이 청운관 게시판 등에 게시한 대자보 <약자임은 정당성을 위한 보증수표가 아니다>는 한 개 장, 절반 이상의 분량을 글쓴이가 성범죄에 대한 왜곡된 인식이라고 부른 것을 지적하는 데에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글을 읽어보면 성범죄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가진 것은 정작 글쓴이 본인이라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습니다. 심지어 글쓴이는 그것이 합리적이고 일반적인 상식인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기까지 합니다. 저는 윤경석 학우를 포함한 학내 구성원 분들 모두와 보다 합당한 관점에서 성범죄 문제를 논의하고 싶습니다.

 

1. 불평등한 성적 자유의 지평

 

윤경석 님 또한 지적하고 있듯이, 성범죄로 인해 침해되는 법익은 피해자의 성적 자기결정권입니다. 성적 자기결정권의 상위 범주인 자기결정권은 타자에게 종속되지 않고 스스로의 결정에 의해 행동할 수 있는 인간의 자유와 존엄에 관한 권리입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결정권을 가지고 있지만, 현실 속에서 자기결정권은 빈번하게 내적·외적인 조건들에 의해 제약받거나 침해당하곤 합니다. 가령 한 노동자가 자기 의사에 도덕적으로 반하는 결정을 기업으로부터 강요받을 때, 그는 기업이라는 상위 권력으로부터 위계의 영향을 받습니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합당한 다른 선택지가 없다면 이 노동자의 자기결정권은 비록 기업에게 가시적인 폭행이나 협박을 받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심히 제약됩니다. 그러므로 자기결정권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유형력에 의한 침해만이 아니라 개인의 행위를 둘러싼 맥락을 면밀하게 살펴야 합니다.

성적 자기결정권 또한 자기결정권의 원리와 동일하게 작동합니다. 성적 자기결정권은 적극적으로는 자신의 성적 욕망을 자유롭게 실현할 수 있는 권리이며 소극적으로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어떤 종류의 행위라도 방어하고 배제하며 거부할 수 있는 권리입니다. 그러나 성적 자기결정권의 해석을 여기서 그친다면 주로 이성애 남성과 이성애 여성 사이에서 실질적으로 벌어지는 성적 자유의 침해를 막을 수 없게 됩니다.

현실 속에서 여성과 남성 간의 성적 관계가 온전히 평등한 관계로 정립되지 못하는 경우는 두 사람의 친밀도와 무관하게 매우 흔합니다. 많은 여성주의 학자들은 이성애 남성의 섹슈얼리티를 중심으로 한 성 담론의 구조에서, 성의 사회적인 의미에는 암묵적으로 강제의 요소가 함축되어 있음을 주장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정상적성행위와 강제적성행위 사이에는 일련의 연속선이 존재합니다. 이것은 모든 성행위가 강간이라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 예외적인 성폭행과 일상적인 성관계를 명확히 구별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성폭행은 젠더 간 위계질서의 영향을 받습니다. 여성과 남성을 포함하는 사회 전반은 여성의 ‘NO’‘YES’로 해석하고, 남성의 욕망을 여성이 현명하게풀어주어야 한다는 남성적 시각에 물들어 있습니다. 남성적 성 인식은 사람들로 하여금 성폭행으로 이해되어야 할 사건들을 일상적인 성관계 혹은 성매매로 해석하도록 만듭니다. 특히 서로 친밀한 관계나 연인, 가족, 동료, 이웃 간의 성폭행은 쉽게 인정받지 못합니다. 이러한 성폭행은 물리적인 폭력이나 실제 협박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신뢰와 친밀함이라는 무형의 강제력에 의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회에서 여성들은 성적 자유의 범위를 크게 제한받습니다. 특히 성행위에 있어 연인 간의 상호 존중에 기반을 둔 민주적인 의사소통은 종종 사라집니다. 남자답게 애인을 벽에 밀치는 것이 매력이나 로망으로 받아들여지는 사회에서 여성은 자신의 의사에 반하는 행위를 거부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자신의 욕구가 무엇인지조차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적지 않은 여성들이 헤어진 후에 과거 애인과의 행위가 성폭력이었다고 인식하는 것은 이런 배경에 근거합니다.

그러므로 성적 자기결정권은 서로 간의 성적 욕망과 이를 실현하는 방식이 다름을 인정하는 평등하고 민주적인 인간관계와 의사소통의 규칙·원리로까지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런 관점 아래에서만 개인은 자신의 의사에 반하는 성행위로부터 자신을 온전히 지킬 수 있고, 실제 발생한 성폭행이 올바르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성적 자유는 강제력의 행사에 의해서만 침해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들 간의 관계에서 성적 욕망에 관한 해석이 상호 공유되지 않음으로써도 침해될 수 있는 것입니다.

 

2. 성범죄는 성적 자결권의 침해다.

 

현행법상 강간죄는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을 간음하는 것으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폭행·협박의 해석에서 법조계의 통설이나 법원의 판례는 최협의설의 관점을 택해왔습니다. 폭행·협박은 피해자의 항거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성범죄 심의에 있어 상식적이지 못한 해석을 자주 낳곤 했습니다. 가령 몸부림치는 것만으로 가해자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크게 거절하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가해자가 없는 사이에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었다는 등의 이유만으로 강간 혐의가 무죄 판결을 받는 사례가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피해자와 가해자가 새벽 3시까지 비디오방에 함께 있었고 이후에도 가해자를 따라갔기때문에 폭행·협박이 있었다고 볼 수 없다는 사건 해석도 나왔습니다.

일반적으로 남성에 비해 신체능력이 부족한 여성이 원하지 않는 성행위에 대해 모두 동일하게 적극적인 저항이나 구조 요청을 할 수는 없습니다. 가해자로부터의 폭행·보복이나 제3자에게 알려지는 것이 두려워서 적극적인 저항을 하지 못할 수도 있고 판단력이 일시적으로 흐려질 수도 있습니다. 그에 더해 실제 사례에서 폭행과 협박과 같은 강제력, 쌍방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위력과 위계는 비가시적인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10대 가출 소녀가 동년배 소년 혹은 지인과 함께 살아야 하기 때문에 성관계 요구에 응한 경우, 동의와 강제 중 어느 것으로 해석할지는 자세한 상황조건에 따라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이성 연인 간에 남성이 성관계를 고집할 경우, 여성은 자신이 준비되지 않은 성관계를 맺거나 남성과의 연인 관계를 끝내야한다는 제한된 선택지 사이에서 일종의 위력 내지는 위협을 당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존하는 강간죄의 규정과 법리에 따르면 이것들은 모두 성폭력으로 해석되기 어렵습니다. 이는 성적 자기결정권의 보호가 아닌 강제력 행사라는 행위에 대한 규제만을 목적으로 하는 현행법 체계와 강제력에 대한 아주 좁은 해석에서 비롯됩니다.

반면 외국의 입법례를 보면 성폭행의 범주를 광범위하게 제시합니다. 미국의 경우 대다수의 주형법이 강간죄의 저항요건을 폐지하였고 상대방의 동의 없이 행해진 성교는 그 자체에 폭력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가해자가 강간죄의 성립에 필요한 폭력을 사용하였는가를 검토할 필요가 없다는 판례를 내놓기도 했습니다.

독일과 스위스는 서로 유사하게 성적 강요죄성적 완전성에 관한 죄를 입법하여 개별 행위의 제재가 아닌 개인의 성적 자유를 보호하기 위한 법률 체계를 고안했습니다. 이들 국가에서 강간이나 추행과 같은 행위는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한 범죄 중 더 높은 처벌을 받는 항목일 뿐 그 자체가 죄의 본질을 이루지는 않습니다. 독일은 강요의 개념을 타인으로 하여금 그가 의도하지 않은 행태를 강제하는 것으로 규정하여 그 초점을 피해자에 맞추고 있습니다. 스위스는 법문상으로도 폭행·협박만이 아닌 심리적 강제에 의한 성적 행위의 강요 또한 처벌합니다.

국내에서는 비동의간음죄를 신설하자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비동의간음죄는 동의 없는 성행위를 성폭력의 기본 구성요건으로 삼아서 이것이 침해된 경우 성폭행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는 폭행·협박이 있지는 않았거나 있었더라도 증명하기는 어렵지만 동의가 없었음을 피해자가 확실히 증명할 수 있는 경우 가해자를 처벌할 수 있는 새로운 법적 패러다임입니다. 또한 기존에는 성폭행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다양한 측면의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를 처벌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긍정적인 논의입니다.

외국의 여러 나라들과 유사하게 새로운 법의 체계를 만드는 것, 기존 법조항들의 세부 내용을 바꾸어서 적용하는 것, 법리의 해석을 보다 확장하는 것은 각각의 장단점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세 가지 모두 가해자 위주의 해석을 강조하던 기존의 법적 담론을 피해자 위주로 전환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는 성적 자기결정권 보호를 강간 및 강제추행 등에 관한 법률의 최우선 목표로 하겠다는 사법부의 의지와도 부합합니다. 가시적인 폭행·협박의 유무에 집착하는 것은 구시대적이고 가해자중심적인 관점일 뿐입니다.

 

3. 피해자중심주의를 다시 생각하며

 

저는 이성애 남성 중심의 섹슈얼리티 담론 하에서 이성애 연인들의 관계는 결코 평등할 수 없음을 이야기했습니다. 성범죄 사건에 있어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는 마치 섹슈얼리티에 있어 여성과 남성의 관계와 같습니다. 피해자의 목소리는 쉽게 묻히고 법적 판단은 가해자의 시각에 맞춰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윤경석 님은 합리적인 재판 과정에서 내려진 무죄 혹은 가벼운 판결의 공정성이 의심받는 것은 부당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법관의 자질이나 법리의 정당함을 의심할 만한 사건들은 매일 같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연습생으로 있던 중학생을 임신시킨 소속사 대표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며 무죄 판결을 받습니다. 가출한 중학생을 성폭행한 가해자가 모텔비 일부를 중학생이 냈으니 합의된 성관계라고 주장을 합니다. 지적장애인을 성폭행한 남자들이 피해자에게 떡볶이를 사줬으니 화대를 지급한 성매매의 관계라고 법원은 해석합니다. 이런 사회에서 성범죄 피해자와 가해자의 위치와 그들을 향한 시선이 정말 평등하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요?

실제 재판에서, 특히 형사 재판에서 피해자들에게 실질적으로 정당한 발언권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해결하기 위해 피해자학과 피해자담론 같은 피해자중심주의가 논의되기 시작했습니다. 피해자가 진술을 정당하게 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다양한 대안을 제시하고 이루어냈습니다. 가령 피해자 대리인 제도와 진술 녹화제도 같은 것이 이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나아가 그 진술을 일체의 편견과 차별적 시선 없이 판단하기 위해 피해자의 진술을 1차적으로 신뢰한다는 원칙을 정립하게 됐습니다.

당사자주의 소송구조를 갖추고 있는 미국 또한 비슷하게 형사소송에서 피해자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범죄피해자권리법을 마련했습니다. 여기에는 피해자가 피고인으로부터 합리적인 보호를 받을 권리, 재판절차로부터 배제되지 않을 권리, 피해자가 자기 의견을 진술할 수 있는 권리, 피해자의 존엄과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는 처우를 받을 권리, 형사절차에 있어 불합리한 지체를 피할 권리 등이 포함됩니다. 미국은 일찍이 이런 제도를 통해 피해자가 진술권을 최대한으로 보장받고 재판 과정에서 생기는 불안으로부터 보호받을 근거를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피해자의 주장을 하나의 의심도 없이 모두 신뢰해서는 안 됩니다. 없는 사실을 꾸며서 진술하는 피해자도, 억울하게 가해자로 몰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피해자의 진술이라 하더라도 합리적인 논의를 거친 후에 증거로 인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우려가 피해자중심주의의 본래 취지를 호도해서도 안 됩니다. 법원은 물론이고 학교와 직장 등 사회 조직에서 피해자와 가해자는 늘 불평등한 대우를 받습니다. 이것을 해소하기 위한 피해자중심주의는 재판을 포함한 모든 구제 절차에서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원칙입니다.

 

성적 자기결정권의 확장, 성범죄 법체계의 개선, 피해자중심주의의 원칙. 누군가는 이것을 일부 여성들이나 주장하는 억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적지 않은 사람들이 지금도 끝없이 주장하고 있는 사안들입니다. 강자와 약자 사이에 현존하는 힘의 차이를 조금이라도 줄여 실질적인 평등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최소한의 대안들입니다.

성범죄 피해자 전문 변호사보다 피고인 전담 변호사가 훨씬 더 많은 세상입니다. 피고인 전담 변호사의 수입이 훨씬 높고, 그들이 낸 서적이 훨씬 더 잘 팔리고, 인터넷에는 가해자 관련 정보와 팁들이 넘쳐납니다. 삼성을 상대로 직장 내 성희롱 문제를 제기해 최초로 승리하고 법조인의 길을 택한 한 변호사가 로스쿨에서 판사 출신의 교수로부터 전해들은 말로 마무리를 갈음하고자 합니다.

 

진실의 편린은 약자나 소수의 편에서 쥐고 있을 확률이 높지. 자네는 그런 입장에서 싸워봤으니 알지 않을까 싶네. 다수의 입장에 서면 사는 게 쉬워지지. 다수나 강자의 입장에 선다는 것은 유리해지는 거니까 말일세. 하지만 법을 하는 사람은, 특히나 아직은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나마, 유리하지 않더라도 진실의 편린을 바라봐줄 수 있어야 하지 않겠나.”

- <예민해도 괜찮아>, 이은의